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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끄적끄적

0109

by 엔프제 2024. 1. 9.

나름 성공적인 결혼생활이라면
서울에서 괜찮은 집에 살고, 남부럽지 않은 수입이 있고, 아이가 있다면 충분한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이렇게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성수동에 살고 싶었고, 나도 남편도 번듯한 직장에 다녔음 했고, 아이를 낳아도 육아휴직은 아주 짧게 써서 정년까지 열심히 맞벌이를 하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살길 바라신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강조하신다
사람은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면서.

그런데 그냥, 요즘에는 말야
사람 많은 갑갑한 지하철과 도시의 소음이 싫고
수많은 즐길거리가 가까이에 즐비한 것도 싫다
나는 깨끗한 새벽 공기의 서늘함과
발치에 바스락거리는 잔디의 기분을 느끼고 싶고
가끔은 물장구도 치면서 멍하니 지는 해와 노을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돈이 많으면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좇으며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그렇게 얻은 부를 단지 남과의 비교를 위해 쓴다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흔히 말하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들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좋은 곳에서 외식을 하고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고
좋은 차를 몰고, 비싼 옷을 입고, 명품을 사고, 하는 것들이
그 모든 것이 결국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나'로 보이기 위함은 아닌가?
그래도 이정도는 해야지. 하는 허울에 갇혀서 말이다

이제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만약 내가 이런 결혼생활을 바랐다면
결국 나는 나를 남들과 비교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이런 생각을 하기 전 까지
'성공적인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떠올렸던 나 역시 무의식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 따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엄마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말한 대로 그렇게.
나도 그렇게

우리 엄마는 나를 낳고 직장을 그만두셨다.
친구네 엄마들은 대부분 맞벌이를 하셨는데,
어릴 땐 우리 엄마가 일을 그만 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엄마가 나 말고 다른 목표를 가졌으면 했다.
내가 아닌, 엄마만을 위한 성취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요즈음의 나는 맞벌이 가정의 친구들을 떠올리고, 그 다음 다시금 나를 생각하며,
내 생각이 틀렸었다고
엄마의 결정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내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들을 한다
집에 가면 나를 반기는 엄마가 있고
갓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아주 깊은 과거의 내 삶의 조각 한 톨 까지도
나는 사랑받지 않은 기억이 없다
내 소중한 유년기의 시간동안 매일 매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기 직전까지, 아니 어쩌면 감은 후 까지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을 때
나도 내 아이에게 이만큼의 사랑을 꼭 주고 싶다고
내가 받은 만큼 너에게도 주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일을 해서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내가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줄 수 있게 될 것 보다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지금 열심히 살아야지
네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도록 응원해줄 만큼은 미리 일해둬야지
아주 가끔은 멀리 가족여행도 갈 수 있게, 사치스럽진 않아도 질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딸린 식구 없을 때 이것저것 많이 배워도 보고
그러기 위해 열심히 노력도 해보고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결국 남이 그려준 결과였다니
허탈하기도 하고, 이제라도 내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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